그리스 신화에서 헬레네(Helene)는 빼어난 미모로 인해 본의 아니게(?) '트로이 전쟁'의 불씨가 된 여인이다. 일명 '파리스의 심판'이라 불리는 세기의 미의 대결에서 우승한 아프로디테(Aphrodite) 여신이 심판관이었던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Paris)를 매수할 때 내놓은 조건이 바로 당대 최고의 미녀 헬레네를 그의 품에 안겨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미 임자가 있는 여인을 담보로 내놓다니, 아프로디테 여신도 어지간히 우승이 탐났던 모양이다. 그렇다. 문제는 바로 이 헬레네에게 이미 메넬라오스(Menelaos)라는 남편이 있었다는 점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
먼저 헬레네의 가계도부터 살펴보자. 공식적으로 따지면 그녀는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오스(Tyndareos)와 왕비 레다(Leda)의 딸이다. 그러나 여러 신화 기록자들이 밝히고 있듯이 신들의 제왕 제우스(Zeus)가 레다에게 반해 백조로 변신하여 그녀에게 접근했고, 이후 레다가 낳은 백조의 알에서 폴리데우케스(Polydeukēs)와 카스토르(Castor) 형제, 그리고 클리타임네스트라(Klytaimnestra)와 헬레네가 태어났다고 한다. 이들 중에서도 클리타임네스트라는 틴다레오스의 딸이고, 폴리데우케스와 카스토르 형제(일명 디오스쿠로이, 제우스의 아들들이라는 뜻), 그리고 헬레네는 제우스의 핏줄이라는 주장과 혹은 형제들 중에서도 폴리데우케스만이 제우스의 아들이라는 설 등이 분분하다.
1 코레지오, [백조와 함께 있는 레다], 1531년캔버스에 유채, 191x152cm, 베를린 국립 회화관 소장
2 체사레 다 세스토, [레다와 백조], 1505-10년패널에 유채, 69.5x73.7cm, 윌턴 하우스, 솔스베리
3 에블린 드 모건, [트로이의 헬레네], 1898년캔버스에 유채, 드 모건 센터 소장
그렇다면 제우스의 피를 이어받은 절세미인 헬레네는 어떻게 메넬라오스와 결혼하게 되었을까? 메넬라오스로 말할 것 같으면, 아트레우스(Atreus)의 아들이자 부유한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Agamemnōn)의 동생이었다. 그 외에 딱히 특출할 것 없는 그가 절세미인 헬레네와 결혼하게 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헬레네가 결혼 적령기에 이르자 구혼자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는데, 신화 기록자들이 남긴 명단만 해도 45명에 이르는 이들 가운데에는 아킬레우스(Achilleus)와 오디세우스(Odysseus)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사내들은 다 있었다고 한다.
그 수많은 구혼자들은 앞다퉈 값비싼 선물들을 늘어놓으며 헬레네와 그녀의 의붓아버지인 틴다레오스의 환심을 사려 했다. 틴다레오스는 혈안이 된 이들의 모습을 보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영리하기로 소문난 오디세우스가 조언자로 나섰다. 구혼자들에게 '헬레네의 남편감이 정해지면 다른 이들은 무조건 이에 따를 것이며 끝까지 그의 명예를 지켜준다'는 맹세를 받으라는 것이었다. 사실 재산이 많지 않은 오디세우스는 진작에 자신이 헬레네의 남편감으로 승산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대신 그는 조언의 대가로 훗날 틴다레오스의 조카 손녀인 페넬로페(Penelope)와 결혼하게 된다.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벌어진 트로이 전쟁
오디세우스의 조언대로 구혼자들로부터 맹세를 받고 틴다레오스가 선택한 사윗감은 부유하고 무난한 메넬라오스였다. 이렇게 한 쌍을 이룬 메넬라오스와 헬레네는 스파르타의 왕과 왕비가 되어 딸 헤르미오네(Hermione)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로부터 헬레네를 약속받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찾아온다. 명분은 국가 간의 외교적인 임무였으나 파리스의 목적은 알다시피 다른 데에 있었다. 이를 알 리 없는 메넬라오스는 파리스를 극진히 맞아주었다.
1 개빈 해밀턴, [파리스에게 헬레네를 아내로 주는 비너스], 1782년~1784년캔버스에 유채, 280x325cm, 로마 박물관 소장
2 개빈 헤밀턴, [헬레네의 납치], 1784년캔버스에 유채, 306x367 cm, 로마 박물관 소장
아프로디테는 파리스와의 약속을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듯하다. 18세기 스위스 태생의 화가 안젤리카 카우프만(Angelica Catarina Maria Anna Kauffmann)의 그림에는 둘을 맺어주기 위해 파리스와 헬레네 사이를 중재하고 있는 에로스와 미의 여신이 등장한다. 전문가들이 나섰으니 결실을 보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던 듯, 벌써 서로를 향한 두 남녀의 눈길이 심상치 않다. 이를 증명하듯 화면 중앙에 그려진 비둘기 한 쌍이 하트 모양을 이루며 서로를 마주 보고 있다.
안젤리카 카타리나 마리아 안나 카우프만, [파리스의 구혼을 받아들이도록 헬레네를 설득하는 비너스], 1790년캔버스에 유채, 127.5x102cm, 에르미타주 미술관 소장
그런데 이 시각, 메넬라오스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전하는 바에 따르면 메넬라오스는 외조부 카트레우스(Catreus)의 장례식에 참석 차 크레타 섬에 가 있었다고 한다. 파리스는 이 틈을 타서 헬레네를 적극적으로 유혹했고 이에 완전히 넘어간 헬레네는 스파르타 궁전의 값진 보물들을 모두 가지고 파리스와 함께 트로이로 가버린다. 일명 ‘헬레네의 납치’로 알려진 이 장면은 수많은 화가들에 의해 묘사되었는데, 정작 '납치'라는 주제와 어울리지 않게 화면 속의 두 남녀가 풍기는 핑크 빛 무드를 감상하는 재미가 만만치 않다. 한술 더 떠서 프랑스의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는 아예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자크 루이 다비드,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 1789년캔버스에 유채, 146x181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트로이로 간 헬레네 그 이후
장례식을 치르고 집으로 돌아온 메넬라오스는 두 남녀에 대한 배신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구혼자들로부터 받은 맹세가 드디어 힘을 발휘할 차례였다. 그는 수년 전 모였던 구혼자들을 일제히 소집하여 트로이 원정대를 꾸렸다. 아가멤논이 진두지휘하고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까지 가세한 원정대와 트로이와의 전쟁은 무려 1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나 파리스의 심판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던 두 여신, 헤라(Hera)와 아테나(Athena)가 비호하는 원정대의 승리는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귀스타브 모로, [트로이 성벽 위의 헬레나], 19세기경캔버스에 유채, 95x50cm,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소장
고대 그리스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Euripides)의 『트로이의 여인들(Trōades)』에 따르면 헬레네는 트로이가 함락된 이후 전 남편 메넬라오스를 만나 목숨을 구걸하고 스파르타로 다시 돌아온다. 그러나 약 3년 이후에 상연된 그의 또 다른 작품 『헬레네(Helenē)』에서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헬레네가 등장하는데, 요약하자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파리스와 눈이 맞아 트로이로 간 여인은 헬레네가 아닌 그녀의 '환영'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진짜 헬레네는 제우스가 보낸 헤르메스(Hermes)가 구름으로 싸서 프로테우스(Proteus)가 다스리는 이집트로 보내졌다고 한다. 헤라의 계략으로 만들어진 환영이 파리스와 결혼함에 따라 헬레네는 부정한 여인이 되었지만 실제 헬레네는 끝까지 정절을 지키며 남편을 기다린 정숙한 여인이었다는 것이다. 에우리피데스가 불과 3년여 만에 헬레네의 캐릭터를 이처럼 뒤집은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물론 그 역시 전승에 근거해 각색한 것이었으므로 애초부터 헬레네라는 여인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묘사가 존재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다만 한때 스파르타의 여신으로까지 추앙받았다고 전해지는 그녀의 또 다른 모습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할 따름이다.
글: 이민수 | 미술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보다 가까운 미술사,
소통하는 미술사에 대해 고민하며 집필 및 강의 활동을 겸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