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렌(Siren)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매우 아름답지만 치명적인 마력을 가진 님프이다. 로마의 시인들은 세이렌들(Seirenes)이 지중해에 있는 사이레눔 스코풀리(Sirenum Scopuli)라는 작은 바위섬에 산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점차 후대로 와서는 꽃으로 뒤덮인 안테모사(Anthemoessa)라는 섬에 사는 것으로 굳어졌다. 어쨌든 절벽과 암초들로 둘러싸인 섬에서 그녀들이 하는 일이란 배를 타고 지나가는 선원들을 향해 노래를 불러 유혹하는 것이었다. 신비로운 노래에 홀린 선원들은 뱃머리를 세이렌의 섬 쪽으로 돌렸다가 배가 난파되어 목숨을 잃거나 또는 스스로 물에 뛰어들어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작자미상, [잔 (손잡이가 없는 젖꼭지 모양) : 두 개의 지켜보는 눈 사이의 세이렌], BC 6세기고대 그리스/로마/에트루리아 유물, 세라믹, 높이 7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신비로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하는 세이렌
신비로운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한다는 점 이외에 세이렌에 관한 정보는 대체로 분분하다. 고대 그리스의 문법학자 아폴로도로스(Apollodoros)는 강의 신 아켈로스(Achelos)가 무사(Mousa) 여신 멜포메네(Melpomene)와 관계해 낳은 세 딸 페이시노에(Peisinoe), 아글라오페(Aglaope), 텔크시에페이아(Thelxiepeia)를 세이렌들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기록에 따라서는 스테로페(Sterope)와 테르프시코레(Terpschore)를 세이렌의 어머니라 주장하기도 하고, 또 세이렌 자매를 세 명이 아닌 네 명으로 보기도 한다.
흥미롭게도 세이렌의 외모에 대한 묘사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한다. 기원전 6세기경에 제작된 고대 그리스의 도기화에는 여인의 얼굴에 새의 몸통과 날개, 다리를 지닌 세이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고대 그리스 서사시인 호메로스(Homeros)의 『오디세이아(Odysseia)』에 나오는 세이렌의 일화를 토대로 한 로마시대 모자이크화에는 몸과 얼굴은 여인의 것이지만 새의 다리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세이렌들이 등장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과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새의 형상이 조합되었다는 것이다.
작자미상, [울릭세스 모자이크], 2세기바르도 박물관 소장
그러나 중세시대 후반 이후부터 미술작품에 표현된 세이렌은 여인과 새의 복합체로 표현되기보다는 점차 여인의 상체가 강조되고 여기에 물고기의 꼬리가 합쳐진 인어(人魚)와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이는 로마 시대 이후 세이렌이 바다의 님프로 여겨지게 된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녀들은 노랫소리로 남자를 유혹해서 잠들게 한 다음 잡아먹거나 죽이는 괴물로, 급기야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치명적인 여인(Femme fatale)'으로 진화하게 된다
1 프레드릭 레이튼, [어부와 세이렌], 1856-1858년경캔버스에 유채, 66.3×48.7cm, 개인소장
2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세이렌], 1900년경캔버스에 유채, 53cm×81cm, 소더비 컬렉션 소장
오디세우스와 세이렌의 만남
사실 세이렌에 관해 전해지는 일화는 많지 않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마도 앞서 말한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알려진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장면일 것이다. 알다시피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군이 승리를 거머쥐는 데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의 아들인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Polyphemos)의 눈을 찌르고 도망가게 되면서 신의 저주를 받게 되었는데, 10년간의 고생스러운 귀향길이 바로 그것이다. 세이렌과의 만남도 그 가운데 벌어진 일화로, 오디세우스는 이 사건을 파이아케스족의 왕 알키노오스(Alcinoos) 앞에서 회고하는 형식으로 들려준다.
오디세우스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풍랑을 만나 간신히 도착한 아이아이에라는 섬에서 만난 마녀 키르케(Kirke)는 오디세우스와 1년을 함께 보낸 뒤 그를 떠나보내며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그중 세이렌의 유혹을 피하는 방법도 알려주었는데, 오디세우스의 배가 세이렌들이 사는 섬을 지나기 전에 밀랍으로 선원들의 귀를 단단히 틀어막게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만은 다른 제안을 한다. 그녀는 그가 원한다면 손과 발을 밧줄로 묶어 돛대에 매어 둔 채로 즐기면서(!) 세이렌 자매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귀스타브 모로, [세이렌], 19세기경유화, 귀스타브 모로 미술관 소장
유혹에 실패한 세이렌, 스스로 파멸을 선택하다
오디세우스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19세기 영국의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John William Waterhouse)가 그린 장면을 보면 오디세우스는 돛대에 몸이 묶여 인면조신(人面鳥身)의 세이렌들에 둘러싸여 있고, 선원들은 이에 아랑곳없이 노를 젓고 있다. 단 한 명의 선원만이 겁에 질린 채 귀를 틀어막고 있을 뿐이다. 호메로스가 두 자매라고 기록한 것과는 달리 여럿으로 묘사된 세이렌들의 표정이 자못 위협적이다. 그것은 선원들을 유혹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매혹적인 노래를 부르고 있다기보다는 절대로 유혹에 넘어오지 않을, 아니 넘어올 수 없는 한 사내를 향한 절규에 가까워 보인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울릭세스와 세이렌들], 1891년캔버스에 유채, 100.6×202cm, National Gallery of Victoria, Melbourne
안타깝게도 오디세우스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는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는 분명 그녀들의 노래 구절이 적혀 있다. 내용인즉, 그녀들의 노래를 듣지 않고는 이곳을 지날 수 없으며, 듣는 이는 즐긴 다음 유식해져 돌아간다는 것, 특히 오디세우스에게 던진 미끼는 그녀들이 트로이 전쟁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오디세우스는 그녀들이 고운 목소리로 노래하자 듣고 싶은 마음에 선원들에게 밧줄을 풀어달라고 명령했으나 미리 일러둔 대로 두 충성스런 부하가 더욱 꽁꽁 묶어주었다고 회상한다.
호메로스는 세이렌들의 다음 노래 구절은 전하지 않는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세이렌의 노래는 소리 그 자체만으로 인간을 홀리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던듯하다. 오히려 그것은 처음부터 노랫말과 관련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오디세우스는 어떤 내용의 노래를 들었을까? 만일 오디세우스가 돛대에 묶여있지 않았더라면 노래를 듣고 난 뒤, 혹은 계속해서 노래를 듣기 위해 바다에 뛰어들 만큼 그렇게 유혹적인 내용이었을까? 어쨌거나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의 유혹과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키르케의 조언 덕분에 말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세이렌], 1889년유화, 캔버스에 유채, 52×82cm, 첸트랄슈파르카세 소장
호메로스 이후 기록자들에 따르면 세이렌들은 선원들이 노래를 들었음에도 그 지역을 빠져나가면 죽음을 택해야 하는 운명이었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한번 더 되물어보자. 세이렌들은 과연 오디세우스에게 노래를 들려주었을까?
글: 이민수 | 미술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보다 가까운 미술사,
소통하는 미술사에 대해 고민하며 집필 및 강의 활동을 겸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