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가니메데스(Ganymedes)는 트로이의 왕 트로스(Tros)와 칼리로에(Calirrhoë) 사이에서 태어난 세 아들 중 한 명으로, 일로스(Ilus)와 아사라코스(Assaracus)가 그의 나머지 형제들이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호메로스(Homeros)에 따르면 가니메데스는 "필멸의 인간들 중에서 가장 빼어난 미남"이었다고 한다. 『일리아스(Ilias)』에 기록되어 있는 이 구절은 트로이 전쟁에서 그리스군에 속한 아킬레우스(Achilleus)와 대결하게 된 트로이의 왕족 아이네이아스(Aeneas)가 자신의 혈통을 자랑하며 읊어 내려간 조상들 가운데 가니메데스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등장한다. |
| 사실 이 대목의 핵심은 조상님이 절세 미남자라는 것보다 그 뒤로 이어지는 구절의 마지막 부분이라 할 수 있다. . 내용인즉, '그 미모 때문에 신들이 그분을 데려갔고 신들의 왕인 제우스의 술을 따르는 시종이 되었으며, 이후 불사신들 사이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신들도 반할 만한 미모로 간택되어 결국에는 '불멸의 생을 얻게 되었다'는 점이 바로 후손 아이네이아스가 내세우는 자랑거리였다. |
| 제우스의 눈에 든 미소년 가니메데스 |
| 신들이 가니메데스를 제일 잘생겼다는 이유로 데려간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제우스를 비롯한 올림포스 12신들에게는 그들이 먹는 음식 암브로시아(Ambrosia)와 음료 넥타르(Nectar)를 시중들어줄 이가 필요했다. 신들의 식생활을 담당하는 이 중요한 임무는 이전까지 젊음의 신 헤베(Hebe)가 맡고 있었다. 그런데 헤베는 마침 불사의 몸이 되어 천상으로 올라온 헤라클레스(Heracles)와 전격 결혼을 하면서 (혹은 발목을 다치게 되면서) 일을 그만두게 된다. 공석이 생긴 것이다. |
페테르 파울 루벤스, [가니메데스의 납치], 1611-1612년캔버스에 유채, 203×203cm, 슈바르첸베르크 궁전 소장 |
| 이에 신들은 이 임무를 맡길만한 이를 물색하던 차에 제우스의 강력 추천으로 가니메데스를 선택하게 되었다. 제우스는 트로이 출신의 아름다운 왕자 가니메데스에게 일찌감치 매료되어 있었다. 신화 기록가들에 따라 제우스가 그를 데려온 과정은 조금씩 다르게 묘사된다. 신의 본 모습으로 직접 내려가서 데려왔다는 설도 있고 또는 신조인 독수리를 보내서, 혹은 독수리로 변해서 이다 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가니메데스를 낚아채 왔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가니메데스는 천상에 올라와 헤베로부터 술잔을 넘겨받음으로써 신들의, 그중에서도 특히 제우스의 음식 시중을 드는 이가 되었다. |
| 미술가들이 묘사한 가니메데스 납치 장면 |
| 가니메데스에 얽힌 신화 속의 이 일화는 고대 그리스의 도기화에도 등장한다. 기원전 500년 경에 제작된 도기 표면에는 붉은 흑색으로 면을 나타내고 검은 선으로 섬세하게 묘사한 가니메데스가 그려져 있다. 소년이라 하기엔 다소 건장해 보이는 남자가 후프를 굴리며 다른 한 손에는 수탉을 들고 있다. 후프는 당시 소년들의 장난감이고 수탉은 신의 구애의 선물이라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술잔 안쪽의 바닥 그림을 보자. 긴 수염에 올리브 화관을 쓰고 왕홀을 쥔 제우스가 가니메데스를 안고 황급히 달려가는 모습이다. |
1 작자미상, [적회식 아티카식 크라테르 (A면 : 가니메데스, B면 : 제우스)], BC 500고대 그리스/로마/에트루리아 유물, 세라믹, 높이 33, 지름 33츠, 루브르 박물관 소장
|
2 작자미상, [적회식 아티카 큰 잔 (둥근 바닥 : 가니메데스를 납치하는 제우스)], BC 490고대 그리스/로마/에트루리아 유물, 세라믹, 루브르 박물관 소장 |
|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바로 제우스의 품에 안겨 있는 가니메데스의 표정이다. 놀랍게도 그는 웃고 있다. 소년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는 제우스의 표정이야 그렇다 치고, 영문도 모른 채 난데없이 납치된 어린아이한테는 적합하지 않은 표정이다. 그러나 제우스의 납치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가니메데스를 묘사한 경우가 적지 않을 뿐더러 후대에도 이어졌다. 일명 코레지오(Correggio, 본명: Antonio Allegri)라 불린 16세기 이탈리아 화가가 그린 [가니메데스] 역시 이러한 전통을 따르고 있다. 제우스의 독수리, 혹은 독수리로 변신한 제우스에게 매달린 소년의 표정은 주인을 올려다보며 황망하게 짖고 있는 개가 무색하리만큼 즐거워 보인다. |
| 물론 그렇지 않은 예도 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가 묘사한 동일한 주제의 장면에는 독수리 부리와 발톱에 옷가지와 팔을 낚아 채인 아이가 울음을 터뜨리며 마치 도움을 요청하듯 관람자 쪽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나 놀랐는지 오줌까지 싸면서 말이다. 아이의 손에는 좀 전까지 천진난만하게 놀면서 꺾은 열매가지가 그대로 쥐어져 있어 사건 당시의 긴박감을 보다 더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
1 코레지오, [가니메데스], 1531년경유화, 캔버스에 유채, 71×163cm,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
2 하르먼스 판 레인 렘브란트, [독수리에게 붙들린 가니메데스], 1635년유화, 캔버스에 유채, 130×171cm, 드레스덴 국립 미술관 소장
|
| 제우스와 가니메데스의 사랑 |
| 초기의 신화가 대체로 헤베를 대신해 신들의 식사와 음료를 나르는 임무를 맡게 된 가니메데스의 일화를 언급하고 있다면 후기로 갈수록 점차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가니메데스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이들의 동성애적 코드가 부각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고대 로마 시대에 활동한 그리스 출신의 작가 루키아노스(Lukiano)는 『대화편(Dialogoi)』에서 제우스의 가니메데스에 대한 사랑을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헤라의 입장을 실감나게 서술한 바 있다. 훗날 트로이 전쟁에서 헤라가 그리스군의 편을 들어 가니메데스의 조국인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데에 일조한 것은 이러한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한다. |
1 안톤 라파엘 멩스, [제우스와 가니메데스], 1758-1759년프레스코화를 옮긴 유화, 180×140cm, 로마 국립회화관
|
2 피에르 줄리앙, [가니메데스와 제우스의 독수리], 18세기경조각, 대리석, 44.3×57x102cm, 루브르 박물관 소장
|
그러나 헤라의 거센 반대와 지탄에도 불구하고 제우스는 자신이 데려온 소년의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불멸의 암말 두 필, 또는 포도나무 한 그루를 하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니메데스는 제우스 옆에서 남은 일생 동안 그의 시중 역할을 다 하다가 밤하늘을 수놓는 '물병자리' 성좌가 되어 '독수리자리' 옆에 놓여졌다.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여신 또는 여인들이 대부분 고된 탄압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성인 남자와 소년의 관계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동성애와는 분명 다른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전히 뭔가 풀리지 않는 구석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 글 이민수 | 미술칼럼니스트
-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보다 가까운 미술사, 소통하는 미술사에 대해 고민하며 집필 및 강의 활동을 겸하고 있다.
|
|
|
|
|
|
|
|
|
|
